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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때 규장각의 초계문신이었던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상여(象輿)였는데, 정조가 그를 사랑한 나머지 ‘상규’라는 이름과 ‘치교(穉敎)’라는 자를 하사했다 한다. 정약용과 함께 벼슬길에 들어서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지냈다. 아버지는 규장각 직제학을 지낸 심염조(念祖)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권도(權導)의 딸이었다. 순조가 죽고 어린 헌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원상(院相)이 되어 정국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가 죽었을 때 헌종은 궁궐에서 쓰는 관(棺)을 내릴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워낙 책을 좋아하여 장서가 만 권이 넘었다. 심상규는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책을 열심히 수집해 그의 서재 속당(續堂)에는 무려 4만권의 책이 모였다고, 홍한주는 ‘지수염필’이란 책에서 전하고 있다. 그는 문장이 간결하고 글씨도 잘 썼다. 시문의 내용이 깊고 치밀했으며 편지글도 좋았다고 한다. 학문은 북학파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용후생을 강조했다. 정치적으로는 노론시파였다. 심상규는 추사 김정희(1786-1856)보다 20년이 앞선 사람이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되는 건, 추사 나이 27세 때인 1812년이다. 병조판서였던 심상규는 성절사로 연경에 간다. 그때 추사는 그에게 스승 옹방강의 아들인 옹수곤을 소개해준다. 추사가 청나라에서 돌아온지 2년. 조선에서는 최고의 ‘연경통(通)’이었으리라. 모르긴 해도 이 일로 심상규가 젊은 추사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이 둘이 두 번째로 연이 닿는 것은 1816년이다. 추사는 31세가 되었다. 그 무렵 남한산성의 수어사(守禦使)를 맡고 있던 심상규가 그곳에 이위정(以威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활쏘기 훈련을 하는 사정(射亭)이었다. 이위정은 ‘군기(軍紀)의 집’이란 의미렷다. 그는 건물을 지은 뒤 ‘이위정기’를 써서, 당시 명필로 소문난 추사에게 가져와 현판으로 써줄 것을 청했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弧矢)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가 위복(威服)하지 않겠는가.(완당평전 166쪽) 이때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 등 스승에게서 배운 금석학을 조선에서 실제로 활용하기 위해 학문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유학생으로서의 프라이드와, 선구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이 그의 영혼을 근질근질하게 할 무렵이었으리라. 추사가 쓴 ‘이위정기’는 3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글씨의 기준작이 된다. (현재 현판은 사라졌고 탁본만 남아있다.) 50대의 두실(斗室, 심상규의 호)이 30대의 추사에게 글씨를 부탁한 정황은, 아마도 학문적 동지로서의 신의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같은 연경 유학파에다 북학 대선배이며, 또 소문난 장서가인 심상규에게 추사는 기꺼이 붓을 들어 현판을 써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1년 뒤인 1827년에 부교리였던 추사는, 심상규의 죄를 묻는 상소를 올린다. 그 전해에 심상규는 우의정에 올라 있었다. 이때 그는 풍덕부(豊德府)의 혁파를 주장하다가 대사간 임존상(任存常)의 탄핵을 받아 강원도 이천에 유배된다. 그런데 두실은 곧 방면된다. 추사의 상소는 아마도 추가로 그를 기소하는 내용인 듯 하다. 두실은 귀양에서 풀려난 뒤 경기도 장단(長湍)의 고향으로 내려가 6년 동안 정치와는 연을 끊고 은둔 생활을 했다. 심상규와 추사 집안의 갈등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순조가 즉위하자 두실은 이조참의에 기용되었으나,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면서 그는 탄핵을 받아 강원도 홍원으로 유배된다. 정순왕후 시절은, 추사 집안인 경주김씨가 세도로 나서던 때였다. (물론 이때 추사의 직계집안들은 이들과 멀리 함으로써 한 동안 정적인 안동 김씨들에게서 호감을 사기도 했다.) 추사 집안은 노론벽파였고, 심상규는 노론시파였다. 정순왕후 시대가 가고, 안동김씨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세도를 펴자, 심상규는 다시 살아나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런 세도가 꺾이는 것이 효명세자가 등장하면서였다. 효명은 추사 집안을 중용하였다. 추사가 심상규를 탄핵하는 상소를 한 때는 그 무렵이었다. 집안이 잘나가는 시절에 앞장 서서 반대파인 심상규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시골에 파묻혀 있던 심상규가 정계로 복귀하는 건, 추사 집안이 한 바탕 나락으로 떨어지고난 뒤의 일이다. 십년 전에 글씨를 주고받았던 학문적 동지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으로 바뀐다. 추사 또한, 어느 순간에 적대적 당파의 공격 목표가 되기도 했고, 심상규의 사례에서 보듯, 정파적으로 보이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쟁은 건전한 대립과 비판의 관계를 넘어서, 당시로서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하고 다급한 게임이었기에, 추사 또한 상황과 계파를 초월한 분별과 이성을 견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추사의 저런 면모는, 안동 김씨들이 추사 집안을 압박하고 추사의 정치적인 기회를 차단하는 상황들을, 재고해보게 한다. 추사의 입장에서만 살펴서, 그들을 사갈시하는 태도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 다시 음미해보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9년여에 걸친 유형을 살고온 추사는 얼마 후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제주에서 풀려난 것이 1848년이고 북청으로 가는 것이 1851년이다. 그 3년 사이에 완당은 제자 하나를 만난다. 그가 동암(桐庵) 심희순(熙淳, 1819-?)이다. 추사보다 23세가 아래인 사람이다. 추사의 인상적인 예서 대련 ‘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또 명월을 부르니 벗이 셋이 되었구나, 함께 매화를 사랑하며 같은 산에서 머무네)’은 이 심희순에게 써준 것이다. 시의(詩意)도 아름답지만, 글씨도 그림처럼 나부낀다. 북청 시절 추사는 심희순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북으로 온 이후에 어느 곳인들 혼을 녹이지 않으리요마는 유독 영감께 유달리 간절하다오. 요즘 같은 말세에 영감을 만나 늘그막을 즐기며 차츰 흐뭇하고 윤택함을 얻어 적막하고 고고한 몸이 평생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는데, 신명에게 거슬림을 쌓은 탓으로 유리되고 낭패되어, 영감과 작별하고 또 천리변방의 요새 밖에 오게 되었으니 어쩌잔 말이오.” 추사의 마음이 허허로움 속에 절절하게 묻어난다. 1851년을 잡으면, 추사 나이 66세요, 동암 나이 43세다. 이 무렵 동암은 삼사의 요직을 지내고 있었다. 동암 심희순은 심상규의 손자이다. 추사는 이 빼어난 후배 지식인을 만나 제자로 삼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심상규는 돌아간지 이미 10여년이 되었다. 추사는 제주와 북청을 떠돌면서, 권력의 무상과 삶의 질곡들을 비로소 객관에 이른 눈으로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 코드가 맞던 대선배를 어느 때 당쟁의 변곡점에서 공격했던 일에 대한 가책이, 문득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손자인 동암을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동암에게 그토록 애정과 연대감을 피력한 것을, 과연 악연의 과거사를 불문하는 그의 소탈함으로만 읽을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엔 추사의 부끄러움이 숨어있지 않을까 한다. 혈기로 어리석어졌던 지난 날을 씻고 싶은 마음이, 동암에게로 쏟아졌을지 모른다. 욕심을 접어가는 나이에 찾아온 이 돌이킴이야 말로, 추사라는 사람 속에 숨어있는 진정 아름답고 귀한 무엇이 아닐까. 남한산성에 가면 이위정은 사라지고 이위정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 터에서 현판의 탁본 복사본을 펴놓고, 심상규의 글귀를 천천히 쓰고 있는, 20년 후배인 추사를 떠올려 보고 싶다. 아직 남은 겨울의 바람이 차가울 것이다.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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